올 들어 미숙둥절이 아침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들어가 전국 곳곳에 있는 온라인 친구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못할 깜찍 발랄 깨방정 이모티콘을 날리며 “굿모닝~! 좋은 하루 보내세요~ 행복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죠. SNS소통이라고는 가까운 친구들과 카톡 주고 받는 게 전부였던 미숙둥절이 처음에는 둥절미를 열씸~~히 선보이며 지나치게 이른 아침부터 지나치게 길고 많은 수다를 떨었더랍니다. 하지만 채팅 피로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체감하고 자제하기 시작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게다가 지금은 여름이잖아요. 고인이 되신 신영복 교수님이 “옆 사람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대조적으로 여름 징역살이는 자기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던 바로 그 여름! 미숙둥절도 여름에는 심각한 의욕상실증을 겪어요 🤭 저기 저 심연에 꽁꽁 숨겨두었던 게으르고 굼뜬 못된 성깔이 여름 모기만큼이나 극성을 부리지요.
이래저래 결국 채팅이 점점 줄고 있어요. 그래도 단지 몇 초 동안이지만 아침 일찍 누군가의 하루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그 순간이 참 좋아요. 다른 이의 하루를 축복하면서 동시에 나를 다독이며 시작하는 하루, 뭉클한 감동이죠?!!
그러다 어떤 날, 이를테면 오늘처럼 물을 한 컵 마시고 가볍게 스트레칭 하는 나에게 내 안의 내가 묻습니다. 좋은 하루······ 는 어떤 하루야? 오늘을 어떻게 보내면, 아니면 오늘 내가 무엇을 얻어야 나는 오늘 참 좋은 날이었다면서 행복해 할까? 정답이 없으면서도 답이 명확한 질문이지요. 김미숙님은 오늘이 어떤 하루가 되기를 바라세요? 김미숙님의 행복한 하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요? 서로 다른 우리 얼굴처럼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오늘은 무척이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겠지요.
어제 EBS중국어 회화 교재를 복습하다가 한 문장이 미숙둥절의 시선을 끌었어요. 자취방 구하러 다니는 내용이었는데 방은 작아도 지내기에 적당한 데다 주변 환경이 편리하다면서 만족스러워 하는 대화였어요.
哇! 挺好的呀 “麻雀虽小,五脏俱全”啊。
满意满意, 这儿位置多好啊。
出门就是超市、便利店,附近还有地铁,
一个都不落, 该有的都有了。
와! 정말 좋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어.
대 만족! 여기 위치도 너무 좋아!
나가면 마트, 편의점, 근처에 지하철도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있을 건 다 있어.
미숙둥절이 꽂힌 부분은 맨 마지막에 “ 一个都不落, 该有的都有了 하나도 빠짐없이 있을 건 다 있다.” 였어요.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척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말이기도 해요.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혹은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가에 따라 저마다 ‘있을 게’ 제각각일 테니까요.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만족스러워하며 행복의 비명을 지르지만 다른 이는 떨떠름하니 뾰루퉁해서는 잔뜩 불만스러워하죠.
그런데 우리는 엄청나게 좋은 일이 크게 빵~ 하고 터지는 것보다 작은 만족을 자주 느낄 때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거죠. 물론 의지박약인 청춘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며 신랄한 비평을 내놓는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결이 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미숙둥절은 어제도 꽤 만족스러웠던 하루 즉, 소확행 했어요.
우선, 오랜만에 수동 그라인더에 커피 원두를 넣고 여유롭게 커피향을 음미하면서 원두를 갈았어요. 그리고 일사 커피포트로 진하게 커피를 끓여 빵과 함께 모닝커피를 즐겼죠. 빵은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밋밋한 크로와상.
그다음은 책을 읽었어요. 토욜에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택배가 도착해 있더라구요. 즐거운 언박싱~ 책상 위에 책들을 꺼내 놓고 눈요기(!)만 하고 바로 취침했거든요. 그 중 박노해님의 시집부터 손에 들었습니다. 초록과 빨강을 거쳐 이번에 그의 시집은 청보라입니다. 보기에는 두꺼운 시집이 생각보다 가벼웠고 천으로 된 표지 감촉이 너무 좋았어요. 시의 제목들도 청보라색으로 인쇄되었네요. 미숙둥절은 그의 시들을 게으름 피우며 읽을 겁니다. 세상 느리게 굼벵이처럼. 절대 빨리 읽지 않을 거예요. 행복 연장의 비밀인 셈이죠 😆
또 하나 더, 나의 일요일을 행복하게 한 것은 뜨거운 오후 햇살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공공도서관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덥고 목마르고 살짝 졸렸지만 모두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주말이라 폐관 시간이 너무 빨랐다는 게 아쉬웠을 뿐.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와 전등은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회 재방송을 시청했어요. tv 시청이 취미인 미숙둥절이 어쩌다 보니 지난 일주일 동안 tv를 한번도 보지 않았더라구요. 무심코 리모콘을 꾹 눌렀다가 그만······, 다 아는 내용의 드라마를 또 코가 맹맹해지도록 울면서 봤어요.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동석(이병헌)의 질문에 강옥동(김혜자)여사는 부잣집에 태어나 글도 배우고 자식도 일 안 시키고 공부만 많이 시키고 싶다고, 성질 못된 아들 동석이 싫어 다음 생에는 엄마, 아들 하기 싫다더니 언제가 가장 행복했냐는 동석의 물음에는 지금이라고, 동석이 부연설명한 것에 의하면 ‘세상 무뚝뚝한 아들하고 제주도 여인이 제주도 한라산 오르려는 지금이 젤루 행복하다’고 답하죠.
그때 미숙둥절은 문득, 김혜자님의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 에피소드가 떠올랐어요. 자꾸 까먹어서 대본을 찢어왔다면서 드라마<눈이 부시게>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치매 노인 배역의 마지막 독백을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들려주셨죠.